
제1810호

2016년 12월 2일 금요일
‘변호인’ 실제 인물
“노무현, 정말로 판사와 싸웠어요”

영화<변호인>양우석 감독은 어두컴컴한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내뱉던 피 묻은 신음 소리와 변호사 노무현의 분노를 말한다. 30년이 지나도 살이 떨릴 만한 고통이지만 이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1981년 봄. 81년 4월과 6월 부산대에서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당국은 배후를 캐내기 위해 분주했다. 정부는 그해 81년 7월부터 부산지역 운동권 색출에 나섰다. 운동조직이라고 해봐야 대학내 동아리와 사회과학 서적 구입을 위한 협동조합(양서협동조합) 정도가 전부였지만 검경은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인 것처럼 포장했다. 딱히 조직 이름을 붙이지도 못해 서울의 학림사건에 빗대어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이라 불렀다. 22명의 학생과 교사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영화 속 부림사건 피해자 중 한명인 국밥집 아들(진우)은 고호석씨와 송병곤씨 이야기가 합쳐진 것이다. 야학 교사를 하다 붙잡혀 간 것은 고호석씨의 이야기이고, 아들이 실종되자 수십일 동안 부산 곳곳을 찾으러 다닌 어머니(순애) 모습은 송병곤씨의 사연을 각색한 것이다.
송병곤씨는 81년 당시 부산대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경찰에 끌려갔다. “81년 7월6일 저녁으로 기억해요. 부산대 동기 호철이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저를 잡았어요.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어딘가로 끌고 갔어요. 대공분실이었어요. 취조실 의자에 앉히자마자 40대 남자가 ‘너 평양 갔다 왔지?’라고 묻더군요.
저는 황당해서 피식 웃어버렸어요. 그러자 경찰은 제 옷을 다 벗기고 미리 준비해둔 군복을 입혔어요. 구타가 시작됐어요.”
부산대를 졸업한 고호석씨는 1980년부터 부산 대동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다. 그는 81년 8월2일 경찰에 끌려갔다. “집으로 가고 있는데 시커먼 사람들이 나타나서 ‘고호석 선생이죠?’ 한번 묻더니 곧바로 저를 대공분실로 끌고 갔어요. 데려간 날부터 구둣발로 밟고 때리고 정신없이 맞았어요.”
대공분실 곳곳에서는 잡혀 온 동료들의 신음이 들렸다. 부산 지역 인권변호사의 대부 격인 김광일 변호사가 검찰의 압력으로 사건을 맡지 못하게 되자, 자신과 인맥이 있던 동료 변호사들에게 피해자들의 변호를 분담했다. 노무현 변호사에게는 고호석·송병곤 등 5명의 피해자가 배당됐다. 고호석씨는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81년 10월께 노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왔어요. 거기서 처음 봤어요.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제가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와 <후진국 경제론>(조용범 지음)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흥분해 판사와 말싸움을 벌이던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항소심 결심 공판 때 노 변호사는 감정적으로 격앙됐어요. 판사에게 제지도 많이 당했고요. 가족들이 ‘저러다 3년형 선고 받을 것을 5년 받는 것 아니냐’ 걱정할 정도였어요.”(고호석) “노 변호사가 ‘미국과 북한이 축구경기를 할 때 북한을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고 따지자 검사가 ‘용공 발언을 삼가라’ 반박하면 판사는 검사 편을 들어줬던 것도 기억이 나요.”(송병곤)
이들은 ‘부림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고문 가해자들이 아직 사과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가해 경찰 이아무개씨 등 2명을 부산지방검찰청에 2011년 고소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각하했다. 송병곤씨는 “부림사건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부림사건’
연루자 28년만에 명예회복
5.18 민주항쟁 이후 신군부에 의한 용공(容共) 조작사건 가운데 하나인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이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부산지법 형사항소3부(홍성주 부장판사)는 14일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 3~7년의중형을 선고받은 김재규(61.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씨 등 재심청구인 7명에 대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법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관련 법 개정에 따라 면소 판결했다.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따로 결정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집행유예 2년~징역 1년6개월과 함께 자격정지 8개월~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피고인들의 계엄법 위반 혐의는 모두 무죄"며 "집시법도 관련 법규정이 바뀌어 사회불안 야기 우려에 대한 조항이 삭제돼 면소 판결을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대법원에서 국가 보안법 부분에 대해서는 파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판단을 할 수 없어 형량으로 대신한다"며 피고인들의 형을 대폭 줄여 재심청구인들은 이 부분에 대한 명예도 일부 회복할 수 있게 됐다.
판결 후 김 씨는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쉽다"면서 변호인단과 상의해 상고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부산에서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은 공안 당국에 의해 1981년 6월부터 다음해까지 잇따라 영장 없이 체포돼 20~63일간 불법으로 감금돼 고문당하고 나서 기소됐다.
김 씨 등은 재판에서 집행유예 또는 징역 3~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대부분 83년 12월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이들은 99년 한 차례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고, 200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재항고해 2008년 대법원으로부터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재심판결을 받아냈다.
당시 대법원은 "학생운동 사회운동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기로 결의한 재심 청구인들의 행동이 헌정질서 파괴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에 해당한다"며 재심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노경민VJ pcs@yna.co.kr
“밥 먹다 끌려간 그날 이후 상처는 영혼까지 남아 있다”
박씨는 최근 영화 ‘변호인’을 통해 재조명된 이른바 ‘부림사건’ 관련자다. 1981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야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부모와 함께 밥상 앞에 앉아 있다 낯선 남자들 손에 이끌려 갔다. 당시엔 눈이 가려져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됐지만, 43일간 이어진 구금과 조사가 그에게 남긴 상처는 컸다. 182cm의 당당한 체격인 그는 지금도 등이 벽에 닿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를 감다가 눈에 비누가 들어가 시야가 가려지면 공포에 숨이 막히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린다.
다짜고짜 종이를 들이밀고 쓰라고 하기도 했다. ‘뭘 써야 하는지 알지’ 하는데 미쳐버릴 것 같았다. 멍하니 앉아 있으면 또 때렸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해도 쓸 말이 없더군요. 동료들과 함께 책 돌려 읽고, 야학을 한 거 외엔 한 일이 없으니 뭘 써야 할지 몰랐어요.”
그는 진술서를 거의 1000장은 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수사관들이 원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교회와 성당 등에서 노동자를 가르쳤으니 ‘노동야학’을 한 건 맞지만, 노동운동을 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한 또래 젊은이들에게 국어, 산수, 영어, 한문 등을 가르쳤다. 결국 수사관들은 그에게 앞서 잡혀온 다른 사람들의 진술서를 가져다줬다. 그들이 쓴 내용대로 맞춰 썼다. 이후 구치소로 옮겨졌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찾아왔다. 박씨는 그를 믿지 않았고 “왜 왔느냐”고까지 했다.
박씨는 당시 ‘노변’을 이성적이고 겸손한 인물로 기억했다. 영화에서는 매우 감성적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사건을 대했고 열 살 넘게 어린, 심지어 초라한 피고인인 자신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는 것이다. 부산 동구 좌천동 한 경로당 앞 정자에서 ‘부림사건’ 당시 경험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박욱영 씨.

영화 ‘변호인’ 개봉은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가됐다. 박씨는 “그 시절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비난하던 주위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그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 게 기쁘다. 종종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어 감사하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사건이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현재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재심 신청 여부
를 고민해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변호인’에
서 가장 인상적으로 꼽는 장면은 ‘송변’이 공안
형사를 향해 “국가는 국민”이라고 말하는 대
목이다. 국민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걸, 그리고 바른 정치라는 걸 지
금도 그는 가슴에 품고 산다. 먼 길을 돌아
정치의 길에 나서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때
문인지 모른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뭘 후회하
느냐”고 반문했다. 젊은 시절, 안
정된 궤도를 박차고 나가 세상과
만난 것을, 배우지 못한 또래를
위해 야학을 한 것을, 나라에서
읽지 말라는 책을 읽은 것을, 부
당한 체포와 고문에 맞서 판검사에게 대든
것을 후회하느냐는 말이냐고, 그의 눈빛
이 묻고 있었다.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
운 시절이었어요. 뜨거웠고, 행복했
습니다. 청춘을 후회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 때문에 삶의 궤적이 달라졌다고
해도, 힘들고 병든 부분이 생겼다 해
도,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을 어떻
게 후회할 수 있겠습니까.” 잔혹한 고문
의 상처를 이야기할 때조차 장난스럽게 빛
나던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